한국사
마구니가 끼었어 1편
지금이 기회
889년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중앙정부의 몰락으로 전국에서 난이 벌어졌다. 궁려는 승려이지만 규율과 용기가 있으며,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무리를 모아야 내 뜻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절을 나왔다. 891년에 그는 죽주에서 자리 잡고 있던 기훤에게 의탁을 맡겼지만 그의 실패에 만족하지 못했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공예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병력을 나누어 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그래서 강원도 원주의 석남사에 머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을 정복하였다. 이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 영월군과 경상북도 울진군에 해당한다.
진성여왕 (894)은 명주를 함락하였으며, 이때 야전군은 3,500명에 이르렀고 14개 부대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명주의 점령은 궁예의 진보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명주는 신라 김경신(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쫓겨난 김주원 일가가 머물며 다스리던 중요한 지역이다. 명주를 얻은 공예는 부하들에 의해 장군으로 진급되었고, 이때 장군 또는 성주라는 칭호는 독립 지방의 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들이 양지로부터 독립한 독립 세력을 형성했음을 나타냅니다.
궁예는 이 상황을 틈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강원도 인제군, 화천군, 진화군, 철원군 일대를 함락시켰다. 사실상 강원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가 성장함에 따라 황해 지방의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항복했으며, 궁예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고 정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 및 지방 정부에 관청을 설치했다.
896년에 궁예는 승령현과 임강현을 공략하여 현재의 황해로와 경기도를 영향권에 포함시키고 송악을 수도로 삼아 주변 지역을 통제하였다. 그 결과 897년에는 지금의 서울권과 인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궁예의 힘이 강해지면서 궁예의 전 상사인 양지와 충돌하게 된다. 당시 양기는 북원과 권원(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등 30여 개의 성을 점거하고 있었다. 양지는 궁예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으나 선제공격을 받아 패하고 기력을 잃었다. 900년에 궁예는 왕건을 보내 지금의 경기도 남부와 충청 북부를 정복하게 했다.
자칭 미륵불
901년에 궁예는 마침내 후기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다. 904년에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무태를 국호로 바꾸고 수도는 철원으로 하였다. 궁예의 위신은 더욱 위엄이 있었고, 그 후에도 세계 각지의 유력한 귀족들은 계속 널리 알려졌다. 남쪽은 현재 경상북도 상주지역과 충청남도 공주지역을 포함하고, 북쪽은 대동강 이남의 황주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905년에서 성책로 바꾸었다.
이 기간 동안 나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궁예의 얼굴은 거칠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군주로서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었다. 광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라고 불렀다. 의상과 행진은 매우 휘황찬란했고 그는 스스로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미륵불은 현재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라 미래의 중생을 구원하는 부처입니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얻은 권위를 정치 경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궁예의 힘의 불안정함도 드러냈다. 짧은 시간에 국명이나 연호가 자주 바뀌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건국 이후의 세대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지리학적 기반이 뚜렷하지 않아 건국 이후 정부를 관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최초의 수도인 송악을 떠나 철원으로 이동한 뒤 송악 등 패서 지역의 세력을 견제하는 의미도 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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