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의 건국자 왕건 2편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다
그러나 권력과 정치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가 궁예의 교만함과 포학함을 보고는 다시 뜻을 변방에 두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세운 공에 비해 포상이 적다고 불평하는 부하들에게 “삼가하고 태만하지 말라. 오로지 힘을 합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께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니, 조정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면서 힘을 다하여 왕을 보필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궁예는 점차 포악한 정치를 펼쳐 신하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의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왕건에게 독자적인 지지 세력이 생겼다는 사실이고, 결국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을 필두로 하는 이 세력은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혹은 왕건이 이들을 이끌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야 적절할까? 새 나라의 국호는 고려, 연호는 천수. 918년 6월의 일이었다.
왕건과 견훤,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겨루다
이제 한반도의 판도는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는 형세로 바뀌었다. 8월에 후백제에서 고려에 보낸 즉위 축하 사신이 돌아간 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웅주·운주 등 10여 지역이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로 붙었다. 긴장의 시작이었다. 920년 10월에 고려와 후백제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려가 이에 응하자 후백제가 고려를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화친을 맺기도 하나, 강한 군사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공방을 거듭하던 927년 10월, 고려는 후백제에게 뼈아픈 대패를 당했다. 당시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더니, 급기야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서라벌을 노략질하는 한편, 새로 경순왕을 세웠다. 신라는 이미 무력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견줄 수 없는 최약체로 전락하여 있었다. 고려가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나가자, 후백제가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직접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견훤을 향해 진격했다. 고려군은 지금의 대구 인근인 공산의 동수에서 후백제군과 격돌하였으나, 대패하고 왕건이 아끼던 김락과 신숭겸 두 장수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왕건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견훤은 그 기세를 몰아 고려를 몰아쳤고, 이후 929년까지 고려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 견훤이 보낸 국서에서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대동강의 물가에서 말을 물 먹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던 때, 왕건은 아마도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최후의 승자 왕건, 한반도를 통일하다
이후의 기록을 읽다 보면, 갑자기 반전이 벌어진다. 929년 12월, 왕건은 견훤에게 포위된 고창군, 즉 지금의 안동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몸소 출정하였다. 유금필의 분전으로 포위를 뚫고 고창으로 들어간 고려군은 이듬해 1월,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견훤을 도주하게 하였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현지의 호족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의 협력 덕분이었다. 이후 영안 등 30여 군현이 투항하고, 다음 달에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110여 성이 고려로 붙었다. 고려 쪽으로 운명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기보다는, 왕건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호족들에 대한 회유와 유화책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옛 신라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의 호족들로서는 아무리 독자 세력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신라의 수도를 짓밟은 견훤에게 우호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견훤은 몇 차례 반전을 노리며 공격했으나, 마침 벌어진 권력 승계 갈등으로 인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고, 936년에 반역자인 아들을 벌해달라며 후백제 정벌의 도화선을 지핀 것은 아마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희극 혹은 비극의 한 장면이 아닐까.
936년 6월, 왕건은 아들 왕무에게 선봉을 맡겨 후백제 공격군을 출병시켰다. 그리고 9월, 직접 본진을 통솔하여 진군한 왕건은 일리천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도읍 완산주까지 점령하였다. 이미 신라는 935년에 고려에 항복한 상태였다. 이렇게 하여 4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후삼국의 쟁패는 끝이 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유일한 패자로 올라섰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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