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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담판하면 나지 서희 2편
1차 고려-거란 전쟁 때의 활약

이 무렵,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과 충돌로 동요하고 있었다. 대륙 북방의 초원에서는 유목민족이었던 거란족이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수장의 지휘 아래에 10세기 초에 국가를 건설하고,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10세기 후반이 되면서 5대10국의 혼란을 정리하고 송나라가 통일을 달성하였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후삼국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 송 사이의 긴장과 갈등도 점차 높아졌다.

이들 나라 사이의 본격적인 무력 충돌은 송이 거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송은 대륙 전체를 통일하는 데에 막 성공한 시점이었고, 거란은 황제의 죽음과 어린 새 황제의 즉위, 그리고 황태후의 섭정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송의 태종은 전격적으로 거란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거란 승천황태후의 빠른 사태 수습으로 실패하고, 송의 큰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 뒤로 송은 거란에 대해 줄곧 수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비록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거란의 입장에서 이는 큰 불안요소였다. 더구나 당시 송은 이 전쟁에 동방의 고려를 끌어들여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협공을 하려 시도하였다. 비록 고려가 참전하지 않아 이 시도는 무산되었으나, 거란으로서는 남쪽의 송과 동쪽의 고려가 손을 잡는 것에 대해 견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거란은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공략하여 제압하면서 점차 한반도를 향해 세력을 확장했다. 압록강 유역에 발해의 후예들이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정안국이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는 아직 압록강 하류 일대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압록강 하류는 대륙과 한반도 사이의 주요한 교통 길목이었다. 고려는 이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려 했으나 현지 여진족의 반발로 실패한 상태였다. 그런데 거란이 이 지역에 군사적 기지를 세워 선점하자, 고려는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993년 겨울에 거란의 소항덕이 이끄는 군대가 공격을 시작하여 1차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려사』 등에서 이 장수를 소손녕이라 했으나, 손녕은 그의 자이므로 소항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거란군이 침입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이 해 여름에 이미 현지의 여진족이 고려에 알렸으나, 고려 조정은 이를 거짓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정치적 태도가 복잡했는데, 고려-거란 전쟁에서도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편에 참전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런 상황에서 오판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이 다시 거란의 침입을 알려오자 비로소 상황이 급한 것을 인식하고 군사를 소집하여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지휘관으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왕 성종이 직접 서경까지 올라가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초반에 봉산군을 잃고 선봉인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안북대도호부까지 올라가려 했던 성종은 이에 서경에 머무르게 되었다.

봉산군의 함락 소식에 서희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소항덕이 내건 침입의 구호를 보고, 서희는 강화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당시 소항덕은 “우리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너희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니 우리가 토벌하러 온 것이다.”라는 주장과 “우리가 이미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소탕할 것이다. 즉시 항복하라.”라는 요구를 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의 견해를 따라 거란군에 사신을 파견해 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소항덕은 이번에는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늘을 대신하여 벌을 내리는 것이다. 어서 항복해라.”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거란의 마지막 구호는 상투적인 것으로 볼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앞서 제기된 두 가지 사항이다. 즉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소유권의 문제와 거란과의 외교 관계, 즉 사대 관계 체결이 관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의 요구 조건을 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대책 수립을 위한 여러 가지 논의가 벌어졌다. 국왕이 수도 개경으로 돌아간 뒤 지위가 높은 신하를 보내 항복하자는 견해도 있었고, 서경 북쪽의 땅을 떼어주고 황주부터 자비령까지를 국경으로 하자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국왕 성종은 뒤의 주장을 채택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것은 적의 군량미가 되지 않도록 대동강에 던져버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바로 서희였다. 서희는 넉넉한 식량은 전쟁의 승기를 잡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이자 백성의 생명줄이니 버려서는 안된다고 성종을 납득시켜 위의 사태를 중단시키고, 거란과 다시 싸워볼 것을 주장했다. 그는 성종에게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은 공갈이며, 만약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삼각산 북쪽이 모두 옛 고구려 땅인데 다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우선 다시 싸워보고 난 뒤에 영토를 떼어주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지고 있을 때, 거란군은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안융진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하자, 거란군은 다시 협상을 제안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서희가 자청하여 교섭의 임무를 맡아 거란군 진지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바로 유명한 서희의 회담이 벌어진다.

서희의 강단 있는 품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이 회담 기록에 전해진다. 서희를 맞이한 소항덕은 의전 절차에서부터 고려측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대국에서 왔으니 서희에게 아랫사람의 예를 따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라는 동등한 자격이니 그럴 수 없다고 맞받아치며 끝내 소항덕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결국 소항덕은 이러한 서희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동등한 예를 갖추며 회담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회담 첫머리에서 소항덕은 고구려 영토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고구려 땅은 자신들이 차지했고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최근 고려가 이를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였다. 이어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과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니 땅을 떼어 바치고 거란에 사대해야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희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선 고려는 나라의 이름부터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고려가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물론 당시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으나, 평양 지역도 ‘서경’ 즉 ‘서쪽 도읍’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어 이렇듯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니, 영토 문제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도 고려의 땅이어야 함을 상기시켰다. 거란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 지역으로 옛 고구려의 영토에 포함되었던 땅이므로 이렇게 반박한 것이다. 한편 거란과 외교 관계를 체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서희는 여진족을 이유로 내세웠다. 고려에서 거란에 가려면 압록강을 건너서 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여진족들이 살면서 길을 막고 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서희는 압록강 안팎이 원래 고려의 영역이라는 중요한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고려가 이 지역에서 여진을 몰아낸 뒤 성을 쌓고 도로를 짓게 해준다면 거란에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항덕은 위와 같은 회담의 내용을 거란 조정에 보고하였고, 거란에서는 이를 대체로 수용하고 전쟁을 중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1차 고려-거란 전쟁은 종결이 되었다.

서희가 거란과의 종전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국왕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직접 밖으로 나아가 서희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의 처리는 서희의 의도대로 온전히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서는 이 때 성종이 즉시 박양유를 사신으로 보내 거란 황제를 알현하여 국교를 체결하려 하자, 서희가 이를 만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소항덕과의 약속은 여진족 문제를 해결하고 압록강 안팎을 고려의 영역으로 확보한 뒤에 국교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아직 압록강 안쪽밖에 획득하지 못했으니 미루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듬해인 994년 봄에 거란에서 보낸 문서에 양국이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거란에서, 동쪽은 고려에서 나누어 성을 쌓고 길을 만들자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서희가 소항덕과의 회담에서 제기한 요구 사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다시 양국 간에 불화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거란의 요청대로 확정을 지었다.

압록강 서쪽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아직 고려가 지배력을 단단히 다지지 못했던 압록강 동쪽 영역에 대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서희는 이 지역에 대한 요새화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994년에는 장흥진, 귀화진, 곽주, 정주, 귀주 지역에 성을 쌓았고, 995년에는 안의진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와 맹주에 성을 쌓았다.

이 지역이 바로 이른바 ‘강동6주’로서, 이후 고려의 중요한 북방 방어 지역이 되었다. 거란과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이 지역의 귀속 여부로 양국 간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도 주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기능하여,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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