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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시대 김구에 대해 알아보자 2편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며 장년에 전성기를 맞이하다
김구가 정계로 복귀한 것은 최항이 사망한 후인 1257년이었다. 『지포집』의 연보에 따르면 다시 한림원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10년 만의 귀환. 그의 나이가 벌써 47세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최항의 아들 최의가 제거되면서 최씨정권이 붕괴되었고, 이어 오랜 항쟁을 끝내고 몽골과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외교적으로 몽골과 교섭하는 일이 국정의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자신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지포집』에는 김구가 작성한 외교문서와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낸 서한류가 약 50여 건 실려 있다. 이는 『동문선』에 채록되어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이 문서들은 1259년부터 127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그 첫 문서는 강화를 위해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태자가 몽골에 입조했을 때 지참한 고주표이다. 작성자인 김구도 사신단의 일원으로 태자를 수행하였다.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간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또 중요한 문서인 고주표를 작성한 당사자로서 김구 역시 큰 책임감을 느끼며 다녀왔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몽골 칸이 죽음과 계승 분쟁으로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태자 일행은 전 칸의 동생이자 장차 차기 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를 맺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몽골에 다녀온 태자가 바로 다음 국왕인 원종이다. 원종대에 김구는 여러 외교 문서들을 작성하면서 그 능력을 입증하였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하례하는 표문, 연호 반포를 축하하는 표문, 공물을 보내는 표문 등이 부분적으로 전해진다. 특히 1263년 4월에 우역 설치와 군대 파견·군량 수송 등의 현안에 대하여 고려의 입장을 알리며 설득한 표문을 작성하였는데, 8월에 원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 높이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로도 양국 간의 중요 현안 논의에서 고려측의 외교 문서는 김구가 작성한 것이 많았다. 그 해 12월에 당시의 중신들이었던 이장용과 유경이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이에 좌간의대부로 임명받은 데에는 이 공이 특히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시 그의 할아버지가 승려였다는 이유로 대간직 임명에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재능이 있으므로’ 원종이 임명을 강행하였다고 한다.

급제 직후에 문제가 되었던 선대의 흠결도 아마 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미 오래전 과거 급제 당시부터 당시 문장의 대가 이규보로부터 훗날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던 김구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에 아름다운 표현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현안에 대하여 잘 정리하고 이쪽의 입장을 상대가 수용하도록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제안하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이는 국왕과 조정 관리들의 논의를 거치며 정리되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조리있고 품격있는 글로 작성하는 것은 문서 작성자의 몫이다. 김구는 왕조 간에 오가는 공식적인 문서뿐만 아니라 원의 고위 관리들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여 양국 간의 현안들을 조율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김구의 공헌에 대하여 『고려사』에 수록된 그의 열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당시에 원이 징계하거나 꾸짖지 않고 넘어가는 해가 거의 없었지만, 김구가 보내는 글을 지었는데, 일에 따라 언사가 모두 이치에 맞았다. 〈황제가〉 답하는 조서에 이르기를, ‘말하는 것이 간절하고 진실하므로, 이치로 보아 마땅히 승인하고 허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원의 한림학사 왕악이 매번 표문을 볼 때마다 반드시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칭찬하면서 그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노년에 접어든 김구는 점차 다음 세대의 외교 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참지정사에 오른 후 참외 문신들을 시험하여 포상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외교 문서 작성 능력을 갖춘 젊은 신하들을 양성하자는 건의를 올려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조치는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통역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제대로 일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한어를 익히도록 통문관을 설치하였다. 통역관을 별도로 두더라도, 외교 사절로 파견된 관리들이 한어로 소통할 수 있다면 일도 수월해지고 통역관들의 농간도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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